마지막 교실

 

동네와 넓은 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동산 널따란 바위 위엔 ‘화성정’이란 정자가 있습니다. 팔각지붕으로 된 작은 정자입니다. 비 오는 날이면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술을 나누기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일하는 한낮에는 정자 아래 개울로 멱 감으러 나온 아이들 차지가 되기도 하고요.

정자에는 액자 하나가 걸려 있고, 액자에는 ‘화성정에서 본 정외팔경’이란 글이 담겨 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입니다.

구리봉을 비추는 밝은 달
국사봉 계곡의 맑은 샘물
독지 벼랑에 떨어지는 가랑비
어답산의 구름
화전리의 복숭아 밭
족은리의 기암괴석
금산의 저무는 석양
복정에서 듣는 어부들의 노래 소리

정외팔경이 모두 한문으로 쓰여 있어 아이들은 그걸 읽을 수도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정자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액자에 담긴 뜻을 헤아려보곤 합니다.
아마 화성정에 처음 올라온 사람이라 하여도 화성정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액자에 적힌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 중 서너 개쯤은 어렵지 않게 맞출 만큼 주변 경치는 빼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포동리에 있는 ‘열녀각’ 또한 마을 사람들에겐 적잖은 자랑거리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남편의 시신을 전라도까지 찾아가 수습하여 선산에 묻고, 평생을 묘지기로 지낸 김씨 부인을 기리는 곳입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내며 그 귀한 마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인 화성정과 열녀각,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화성정도, 화성정에서 바라보는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도, 열녀각도 이제 얼마 후면 모두 물에 잠기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이 물에 잠기고, 그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횡성댐 때문입니다. 횡성과 원주 지역의 식수와 생활용수, 그리고 농공업 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고 있는 횡성댐 공사가 머잖아 끝나게 되면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 갑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에 잠기는 건 마을뿐만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살아오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수십 길 근심 속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농사짓기 지겹던 땅 속 시원히 잘 팔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말을 잊었습니다. 조상들이 잠들어 계신 선영을 옮기게 되었으니 조상들 앞에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느냐며, 죄인들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한시를 잘 짓는 할아버지 한 분은 어느 날 저녁 더는 농사를 지을 것도 없는 논둑에 펑퍼짐히 앉아 동네 할아버지 몇 분과 막걸리를 마시다 고향 떠나게 된 심정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대대로 살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물에 잠기니
눈물 머금고 떠나갈 때에 착잡한 감회는 깊기도 하다
조상님 선영은 객지에 옮겨야 하고
일가친척의 옛집 멀리 떨어지기 애석하구나
글을 짓고 서로 사귀던 의리를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만 슬퍼지고
술잔을 기울여 과거의 정을 나누며 섭섭한 마음으로 옷깃을 다시 잡는다
어느 낯선 강산에 살 터를 정할 것인가
몸은 늙고 자식은 아직 어려 이 또한 수심이로다

붉은 노을을 이고 땅거미 깔려드는 들판, 주름진 눈가가 젖은 것은 노래하는 할아버지만은 아니었습니다.
맘씨 좋기로는 둘째 아닌 꽃댕이 할머니조차 땅값 보상을 위해 현장조사를 나온 사람들이 다녀간 뒤엔 전에 없던 역정을 쏟아냈습니다.
“차타구 쪼루루 와가지군 휙- 둘러보믄 그만인감. 차 못들어가는 댄 쌩앵경으루 쳐다보구 사진이나 박구. 지덜이 흙 한 번 손으로 만져봤나, 냄새 한 번 맡아봤나, 조상들이 으트게 물려준 땅인디 지들이 그릏케 갑슬 미겨?”

선아 할머니는 당신은 죽어 붕어가 되겠다고 했답니다. 살던 집터도 그렇고, 빨래터도 그렇고, 나물 캐러 오르던 오솔길도 그렇고, 물에 잠겨버린 동네를 붕어나 되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사랑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들은 모두들 마음이 같았는지 선아 할머니 말에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갑천면에 있는 화성초등학교 5-6학년 교실, 학생이 적어 두 학년이 한 반에서 배우는 교실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오늘이 화성초등학교의 마지막 날, 내일부턴 학교가 문을 닫습니다.
연단에 선 교장 선생님도, 앞줄에 선 세 명의 선생님도, 연단 앞에 쪼르르 줄 맞춰 선 스무 여명의 학생들도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버린 마지막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온 5-6학년 학생들은, 아직 선생님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전에 없이 조용했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체육시간 운동장 같았을 교실에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 자리에 앉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창밖을 멀거니 내다보는 아이,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묻은 아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들은 물론 동네 할아버지들도 어렸을 적 다녔던 이 학교가 오늘로써 문을 닫는다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손때가 묻어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책상과 나무마루, 숙제와 떠든 아이 이름이 적히곤 하던 낡은 칠판, 자기들이 쓴 글과 그림이 붙어 있는 게시판, 숨이 멎도록 뛰던 운동장과 운동장 양쪽에 서 있는 축구 골대, 철봉과 그네, 학교를 빙 둘러 울타리 삼아 서 있는 키 큰 소나무들….., 이제는 그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마음 아픈 건 같이 지내던 친구들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아무 것도 약속할 것이 없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도 그 소리가 크게 들렸을 것 같은 교실의 조용함을 깬 건 대석이였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개구쟁이 중의 개구쟁이 대석이가 드르륵- 교실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확, 뒷자리로 쏠렸던 눈길이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후 드르륵- 하며 이번엔 앞문이 열렸습니다. 이번에도 대석이였습니다.

늘 그랬듯이 아이들은 대석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앞문을 열고 들어온 대석이 손엔 깨끗하게 빨아온 걸레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난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대석이는 천천히 교탁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반 아이들의 눈이 쏟아질 듯 대석이에게로 쏠렸습니다. 교탁을 다 닦은 대석이가 창문 쪽 맨 앞자리, 미리 전학을 가 비어 있던 미경이 책상을 닦기 시작했을 때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걸레며 비를 찾아 교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귀한 손님들이 올 때보다 더 정성스럽고 깨끗하게 교실을 닦았습니다. 건성으로 쓸고 건성으로 닦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책상 속까지도 다 닦았습니다. 유리창이 그렇게 깨끗한 적은 전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교실로 들어서던 선생님의 발걸음이 그만 문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을 통해 청소를 하고 있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던 것입니다.
교실 문은 한동안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교실 문을 사이에 두고 두 눈이 모두 젖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다음 일을 아예 잊고 있었습니다.

 

 

2 답글
  1. 손미란
    손미란 says:

    목사님 책 ♡예레미아와함께울다♡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이 동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예레미아와함께우시는 목사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2. 한 희철
    한 희철 says:

    이곳에 글을 남기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답이 한참 늦었네요.
    제 서툰 글을 꼼꼼하게 읽고 이처럼 귀한 메아리를 남겨 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있어 그나마 희망이 지켜지는 것일 테고요.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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